맺을 종! 이야기

終 (맺을 종..아니 마칠 종) 이야기!

등짝스매싱 2005 2019. 11. 16. 20:21


                   

                                    # 맺음이란 단어가 필요없다면 달력이란 건 굳이 존재할 필요가 없을지도 모른다.


달력이 주는 의미는 세월의 흐름을 알리는 것도 있지만 무언가 한획을 긋는 일정들을 표시해주는 뜻도 있을 것이다.


계절의 변화 말이다.


11월이라고 해서 가을이 끝났다고 말하기도 그렇다.


입동이니 뭐니 하는 단어들보다 가을이 끝나간다는 걸 체득하는 건 바로 주변 환경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옷이 두터워지고 몸에 느껴지는 한기들, 더불어 종종걸음으로 재촉하는 집을 향한.. 풍경들 말이다.


일터에서 직접 느껴지는 일상은 굳이 그런게 아니라도 알 수 있는 방법이 많다.


비가 오고, (이걸 겨울을 재촉하는 비라는 걸 예감하는 건 오랜 세월의 경험치라 봐도 무방할 것이다.)


겨울이 다가오면.


추워진다.


그런 보편적인 말 말고 우리같은 일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체득하는 건 한파에 대비하는 작업을 하는 것이다.


영하 10도도 아닌 영하 2도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지만 실제 체감온도를 느끼는 입장에선 가장 먼저 두터운 옷을 찾게 된다.


시야를 돌려보면 평소 보기 힘든 모습들이 눈에 뜨인다.


사진 속의 저 남자분이 왜 도로 한가운데 비를 맞아가며 무언가를 쳐다보고 있는지는 나도 잘 모른다.


한가지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분명 계절이 바뀌고, 그 계절이 겨울이라는 것! 맺을 종이란 단어가 이제 한 지면을 장식하기 시작했다는 거 말이다.




                                   # 지긋지긋하던 낙엽과의 사투를 끝낼 때가 온 것 같다.


비가 며칠 간헐적으로 오고나니 그렇게 많던 낙엽들이 어디론가 사라지기 시작했다.


미처 피난가지 못한 녀석들은 오롯이 내 빗자루와 쓰레받기 속에 갇혀서 어디론가 실려갈 것이다.


비에 젖은 낙엽을 쓸어 낸다는 건 곤혹스럽다.


살면서 요즘처럼 낙엽을 많이 쓸어보기도 처음이다.


그 자리에 눈이 대신할지 모르겠다.


그 다음엔, 얼음이, 그 다음엔 또 무언가가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을지 모른다.


가을을 떠나보내며 한가로운 망상을 즐기기에는 내가 일하는 곳에서는 음미하기 힘든 감정이지만 그나마 쓸다가 숨을 몰아쉴때면

잠시 생각을 가다듬어 본다.


내년 이맘때에도 나는 낙엽을 쓸고 있을 것인지.


세월이 점점 빠르게 다가갈수록 무언가 매듭을 지어야 한다는 강박 관념과 모든 걸 포기하고 이제 정리를 해야할 때가 오고 있다는

엇갈림이 나를 혼란하게 한다.


컴퓨터 글씨가 잘 안보여서 안경점을 가서 새로운 안경을 맞추려고 한 순간.


직원이 넌지시 말한다.


"손님께서 찾으시는 원거리와 근거리를 동시에 다 충족시키는 안경은 누진다렌즈 밖에 없습니다."


보조 안경 하나 맞추러, 그래서 굳이 비싼거 아니라도 상관없다고 말한 내게 그가 말한다.


"컴퓨터 글씨를 잘 보시려면 한 가지를 포기하셔야 합니다. 즉, 멀리 보이는 걸 도수를 줄이고 가까운 거리에 도수를 맞추는 겁니다."


그의 말인 즉슨.


가까운 걸 보려면, 멀리 보는 걸 포기해야 한다는 말이다.


누진다렌즈 안 맞추려면.


잠시 고민을 한다.


"그럼 여기 온 목적이 가까운 거 보려는 거 때문에 온거니까 그렇게 합시다."


새로운 안경을 쓴 순간 잘 보이던 원거리 풍경이 흐리게 보인다.


안경을 벗고 봐야했던 사물이 대신 잘 보인다.


결국, 한가지를 잃어야 한 가지를 얻는다는 것인지.


입맛이 씁쓸하다





                                        # 내 또래 사람들에 비하면 비교적 컴퓨터도 잘 만지고, 어지간한 디지털에 대해서는 치매 소리를

듣는 편이 아닌 나로서는 매일 겪는 100인 100색의 손님들을 상대하느라 답답할 때가 많다.


기기 앞에서, 분명 눈 앞에 시작하기라는 화면이 보이는데도 옆의 화면을 누르는 사람들, 카드를 삽입하는 곳이 써 있는데도 아래 지폐 투입하는 곳에다 카드를 꽂아넣고 나에게 빼달라고 하는 사람들, 주유기를 제대로 꽂아 넣지 않고 레버를 끼워놓은 채 기름 안들어 간다고 항의하는

사람들, 각양각색이다.


그럴때 나는 점잖게 한 마디 한다.


"손님!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습니다."


기계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다.


오로지 그걸 만지고 사용하는 인간들의 잘못일 뿐이다.


그럼에도 인간들은 짜증부터 내거나, 그러지도 않고 그냥 주유도 안하고 가버리는 사람도 있다.


디지털이 점점 변화할 수록 젊은 사람이 아닌 나이먹은 세대들의 취약점이 정말 큰일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나도 언젠가는, 어디가서는 역시 디지털 치매 소리를 들을지도 모르지.


폰을 너무 정확하게 사용하는 여친덕에 급행 열차 시간을 알아서 맞춰 타야하는 버릇이 생긴 것도 최근의 일이다.


"어디야?"


"가고 있는데?"


"급행 안탔어?"


"놓쳤어"


늘 집에 앉아서 오로지 폰 하나로 내 일거수 일투족을 체크하는 그녀의 닥달거림(?)에 몇번 투덜거리기도 했지만 이젠 디지털치매라는

소리를 듣기 싫어서 스스로 알아서 먼저 체크하고 다닌다.


"지금 용산 급행 탓음. 몇시에 도착 예정!"


참 피곤하다.




                                 # 일상 블로그를 쓰면 실패한다고 다들 그랬다.


블로그를 이용해서 부수입을 올리는 파워 블로거들의 입장에서 보면 일종의 넋두리같은 내 블로그는 아무런 영양가가 없는 블로그일지

모른다.


그걸, 지난 17년 가까이 해오면서도 나는 후회는 하지 않았다.


그냥 블로그는 오롯이 내 삶의 일부분이었기에 그렇다.


새롭게 마지막 블로그라 생각하고 시작한 이 블로그를 어떻게 좀 더 색다른, 나의 모든 것이 함축된 공간으로 만들 수 있을지 고민중이다.


영상 공부를 (지금까지 유일하게 해보지 못한 분야다)해서 영상을 올려보는 게 마지막 꿈이 될지 모르겠다.


누가 뭐라던, 찾아주는 객이 있던 없던, 지난 17년 동안 그래왔듯이 나는 묵묵히 나만의 블로그를 운영하고 있을지 모른다.


이제 맺을 종에 걸맞는 이야기들을 계절이 바뀔때마다, 달력이 바뀔때마다 써보려고 한다.


그건 하나의 매듭이고, 새로운 시작의 출발점이다.


잘 될지는 모르겠다.


오래전에 자주 썼던 폴발레르의 구절로 마감을 한다.


'바람이 분다. 살아야겠다'